피아노와 인생

쇼팽의 연습곡과 바하의 평균율

차한잔의여유 2009. 9. 7. 21:08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때 중학교 입학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지내던 내가 딱하게 보였었는지 혹은 대학교 진학이 확정되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것이었는지 아뭏든 세째 누나가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그때였었다. 바이엘부터 시작해서 체르니 100까지 누나의 도움을 받으며 배웠고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바빠졌는지 체르니 30은 그냥 독학하란다. 어쨋든 그렇게 해서 중1부터 체르니 30, 소나티네, 바흐 인벤션 등을 거의 독학 (물론 중간중간 누나의 감수를 받았지만) 하다시피 한 나에게 피아노의 매력과 황홀함을 느끼게 해준 그래서 지금껏 피아노와의 인연을 맺고 살게끔 해준 일대 사건이 두 번 있었는데 첫번째가 앞서의 글에서 언급했던 (형이 선물했다는) 쇼팽곡집 복사테입이었고 두번째가 바로 세째 누나의 즉흥환상곡 (특히 중간의 느린 부분) 연주였었다. 어쨋든 그렇게 해서 쇼팽에 대한 그리고 쇼팽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나의 관심은 중학교 2학년때부터 증폭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체르니 40을 부분적으로 떼자마자 누나만 치던 그래서 성역과도 같았던 쇼팽 종합 곡집(쇼팽의 대중적인 곡들만 모아놓은 쇼팽 입문용 곡집)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쇼팽 종합 곡집에서 처음 친 곡들은 주로 왈츠,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등과 같은 춤곡이었고 또 맨 뒤에 있었던 즉흥환상곡 역시 피나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쯤에 나오는 연습곡이나 발라드 등은 상대적으로 어려워서 역시 엄청난 노력을 하는데도 쉽사리 정복되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습곡의 경우에는 스피드도 스피드지만 복잡한 조옮김과 옥타브를 넘나드는 운지법으로 기존 모짜르트나 베토벤의 곡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계속 받게 되었다. 그리고 쇼팽 종합 곡집에는 없었지만 형이 선물해준 쇼팽 테입에는 들어있었던 흑건, 혁명 등도 역시 기교적인 부분에서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쇼팽 연습곡에 대한 경외심과 동경은 중학교 내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급기야 쇼팽의 연습곡 전곡 연주를 한번 들어나 보자 라는 생각으로 동네 레코드 가게를 들리게 되었고 거기서 마우리찌오 폴리니가 연주한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을 구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쇼팽연습곡과의 그리고 마우리찌오 폴리니와의 강렬한 만남은 바로 그때 시작된 것이었는데 바로 레코드를 틀자마자 웅장하게 시작되었던 연습곡 1집(Op.10)의 1번(승리) 곡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1번 뿐 아니라 24곡 모든 곡들이 하나같이 어떻게 인간이 저러한 곡을 칠 수 있으며 또 작곡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곡들이었고 그 이후 쇼팽의 연습곡들은 아직도 제대로 다 치지 못하면서도 늘 도전하는 나의 애증과도 같은 피아노 곡들이 되었다.

 

쇼팽의 연습곡 Op.10의 12곡은 쇼팽이 19~22세 일때 작곡된 것이고 Op.25의 12곡은 23~26세 때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연습곡과 비슷한 곡집인 전주곡 Op.28의 24곡은 뒤이어 27~29세 때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쇼팽의 가장 창조성이 빛나는 20대를 쇼팽은 연습곡과 전주곡의 작곡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연습곡과 전주곡 총 48곡의 작곡에 왜 쇼팽은 그의 20대를 바쳤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쇼팽의 전주곡집이 바흐평균율 곡집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쇼팽의 연습곡도 바흐의 평균율 곡집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쇼팽의 연습곡이 바흐 평균율 곡집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대략 3가지인데, 1.조바뀜이 빈번한 곡들이 약 1/3을 차지한다는 점과, 2.바흐 평균율 푸가의 에피소드 부분들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동형 진행 기법(동형 멜로디 또는 동형 프레이즈가 근처의 조로 옮겨지면서 두세번 정도 상향 또는 하향 진행되는 기법)이 쇼팽 연습곡들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점, 3.곡의 순서에 조와 관련된 어떤 규칙이 있다는 점 등이다. 위 3번의 경우는 Op.10의 처음 6개의 곡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장조(1번) --> 가단조(2번) --> 마장조(3번) --> 올림다단조(4번) --> 내림사장조(5번) --> 내림마단조(6번) 에서 보듯이 전주곡집과 비슷한 진행을 엿볼 수 있고 실제로 규칙적인 조 배치에 대한 쇼팽의 처음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물론, 그 뒤로는 이러한 엄격한 진행은 깨지지만 중간 중간 같은 수의 플랫 또는 샾을 갖는 장조와 단조가 병행해서 나오기 때문에 쇼팽이 전주곡 작곡 이전에 이미 연습곡에서 평균율 곡집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판단할 수 있겠다.

 

즉, 젊은 날의 쇼팽은 바흐의 곡들을 연구하였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평균율 곡집의 곡들에 깊이 심취해 있었던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쇼팽이 20세쯤에 작곡했던 피아노협주곡 1번에도 동형 진행 기법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것도 역시 그러한 사실과 무관치 않다고 판단됨). 즉, 당시 점점 평균율 조율법이 순정율 조율법을 대치해가고 있었지만 조율법의 진화와는 별개로 평균율의 무한한 가능성과 특징을 좀 더 부각시켜줄 만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쇼팽의 연습곡집이 그 후속타를 날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쇼팽은 그의 연습곡을 통해서 단지 평균율의 확장만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그는 그의 연습곡 24곡을 통해서 피아노의 모든 가능성을 테스트 하고자 했고 또 성공했던 것이다. 즉, 고전주의(하이든-모짜르트-베토벤)의 피아노 기법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극한적 기교들을 새롭게 피아노에 이식하는데 성공했고 또한 Op.10-11, Op.25-1번 곡 등과 같이 피아노를 마치 현악기처럼 들리게 하는 기능을 부여하는데도 성공했던 것이다. 또한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을 과연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지 그래서 청중이 그로 인해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지를 실험했으며 결국 그것에도 성공하였던 것이다. 정말이지 쇼팽은 천재이며 그의 연습곡 24곡은 바흐의 평균율 곡집과 함께 피아노 음악에 있어서 가장 최고봉이자 인류의 빛나는 문화유산이라고 또한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습곡 전곡을 연주한 음반은 너무도 많아서 이 자리에서 일일히 열거할 수는 없으나 그 중 몇 개만 뽑아보기로 하자. 먼저 앞서 언급한 마우리찌오 폴리니의 명반이 있고, 두 번째로는 루이 로르티의 음반이 있다. 루리 로르티의 음반은 폴리니보다도 좀 더 건조하게 들리고 힘이 없다는 단점이 있으나 깔끔함과 명료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 번째로는 최근 녹화한 발렌티나 리지차의 DVD가 있다. 필자가 최근 그 DVD를 시청하면서 느꼈던 가장 놀라웠던 점은 먼저 그녀의 표정이 그 어려운 곡들을 연달아 치면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표정관리가 된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그녀의 리스트 음반을 듣고 기대하긴 했지만 역시나 그 명료함과 스피드 그리고 감성표현에 있어서 그 DVD를 따라올 연주는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네번째로는 소콜로프의 음반이 있는데 Op.25만 남겨서 아쉬움이 있다. 그 외에도 부닌, 가블리로프, 베레조프스키, 그리고 루간스키 등 러시아 계열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 음반들이 있으나 위에 언급한 명반들에 비해 약간의 아쉬움들이 있는 음반들이다. 

 

 

2007/12/09 씀 (2025/1/21 마이너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