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의 작곡기법에 있어서 이 32번 소나타의 1악장과 2악장은 만약 베토벤이 10년만 더 살았었더라면 더 꽃을 피웠을 법한 새로운 작곡기법을 담고 있는데 그 기법은 바로 2개 또는 그 이상의 주제들이 마치 서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얽히고 섥혀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주와 반복을 되풀이 하면서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지만 굳이 붙이자면) progressive recursion 기법이다. 1악장의 경우에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에 바하의 푸가적인 기법을 접목하여 progressive recursion을 이루어내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새롭고도 획기적인 시도였으며, 그 기법이 후에 베토벤을 흠모하던 리스트에 의해 다시한번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리스트의 피아노소나타 B단조인 것이다. 2악장의 경우에는 2개의 주제가 마치 변주곡처럼 서로 번갈아가면서 여러번 변주되는데 각 변주파트들이 각각 독립된 파트들이 아니라 이전 파트와 이후 파트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준다는 점에서 일반 변주곡 형식과는 차별화된다. 즉, 변주곡 형식을 이용하여 두 주제가 서로 얽힌 채로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progressive recursion 기법을 이루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32번 소나타의 음반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만큼 virtuoso적인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하면서도 심오한 정서를 잘 살려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곡이기 때문이리라.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그러한 의미에서 최고의 연주이지만 폴리니의 연주도 그에 못지 않다. 1악장 연주의 판가름은 왼손의 16분 음표들이 뭉개지지 않고 얼마나 또렷이 들리느냐에 있는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포고렐리치가 1위, 폴리니가 2위이지만 상대적으로 폴리니가 더 빨리 치기 때문에 기술면에서는 확실히 폴리니가 앞선다고 할 수 있겠다. 2악장의 경우에는 중간의 클라이맥스에서 32분 음표와 64분 음표들이 현란하게 난립하는 상황에서 32분의 12 박자라는 초유의 박자와 그 리듬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32번 소나타 연주의 핵심은 1.) 페달 사용 자제, 2.) 왼손의 구슬같이 또렷한 터치, 3.) 전체적인 통일성 등이다.
최근에 미아 정의 음반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속도나 스케일 면에서는 확실히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구슬같은 또렷한 터치와 섬세한 표현 등은 좋았었다. 즉, 신세대 피아니스트들이 포고렐리치와 폴리니를 벤치마킹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는데 이것은 좋은 현상인 것 같다. 오히려 박하우스, 리히터 같은 과거의 대가들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베토벤 방식 - 즉 속도감과 화려함- 으로 역시 32번을 연주했었는데 이는 베토벤이 말년에 추구하고자 했던 좀 더 섬세하고 낭만적인 감성이라는 부분을 그들이 놓쳤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쨋든 비창이나 월광과 같이 popular하진 않지만 인간의 가장 깊고 슬픈 내면으로부터 가장 심오하고 가슴벅찬 환희를 이끌어 내어주는 32번 소나타야말로 9번 합창 교향곡과 함께 베토벤이 인류에게 선사해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007/6/10 (2009/4/1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