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인생

쇼팽의 슬픔과 발라드 4번 I

차한잔의여유 2009. 4. 11. 14:51

중 1 겨울방학때 형이 동네 음반가게에서 싸게 복사(?) 했다며 내밀었던 쇼팽 피아노곡집 테입에 발라드 4번이 들어있었다. 당시 고 2였던 형은 기타를 배우면서 클래식 뿐만 아니라 팝송, 가요 등을 두루 듣고 있었는데 내가 배운지 1년밖에 되지 않은 피아노 실력으로 열심히 소나티네와 인벤션 그리고 모짜르트 소나타 등을 치고 있는 것이 대견하게 보였던지 쇼팽곡집을 선물하면서 그렇게 쇼팽과의 인연을 맺어 주었다. 물론 형이 쇼팽을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내가 쇼팽을 좋아하게 될거라는 것을 미리 예상했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을테고 우연히 그냥 피아노곡 테입 복사를 요청했는데 음반가게 주인이 별 생각없이 쇼팽곡집을 복사해주었던 것 같다. 어쨋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쇼팽과의 인연이 그 후 25년동안 지금까지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로 대표되는 chaos 이론이 맞는것도 같다. 정말 인생은 우연히 그리고 아주 작은 사건들에 의해 이리 꺽이고 저리 꺽이는 참으로 dynamic한 그 무엇이 아닐까..

 

아뭏든 난 그 때 그 테입을 겨울방학 내내 들으면서 쇼팽이 남긴 수많은 명곡들을 치지지직 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맛보게 되는데 비록 지금의 깨끗한 디지탈 음질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그 곡들을 들으면서 받았던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는 충격적이었다. (그 곡들 중에는 왈츠 1번, 왈츠 6번, 흑건, 혁명, 군대, 영웅, 즉흥환상곡, 발라드 4번, 녹턴 8번, 자장가 등이 있었다. 마지막에 쇼팽의 자장가 후반부가 짤리면서 그룹 E.L.O의 midnight blue가 녹음되어 있었는데 그 걸 보면 당시 그 음반 주인이 얼마나 무성의하게 복사를 해주었는지 알 수가 있다.^^) 쇼팽의 음악이 그 당시 나에게 충격이었던 이유는 피아노 그리고 피아노를 비롯한 모든 악기가 그저 아름다운 소리만 만들어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감정이 표현되고 또 전달되는 통로임을 알게해 준 데에 있다. 쪼끄만 중학생이 알면 뭘 알까 싶지만 그 때 분명 난 쇼팽의 음악을 통해서 쇼팽이라는 한 인간의 즐거움, 슬픔, 분노 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혁명은 쇼팽의 분노를, 발라드 4번은 쇼팽의 슬픔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후에 쇼팽의 조국 폴란드의 역사와 그의 개인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 곡들이 왜 그렇게 느껴졌었던가를 후에 깨닫게 되기도 하였다.

 

서두가 길었지만 어쨋든 발라드 4번을 들으면 인간 내면의 깊고도 모질게 간직되어 있는 슬픔, 즉 한을 느낄 수가 있다. 한이라는 개념은 한국인에게 친숙한 개념이지만 애국자였던 쇼팽도 조국의 운명과 육체적 병, 그리고 외로움으로 인한 깊은 슬픔 즉 한을 지녔었던 것 같다. 쇼팽의 곡들 중에 유달리 우울하고 침울한 단조의 곡들이 많은 이유도, 그리고 불협화음이 많이 사용되었던 이유도 바로 그러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장송행진곡, 발라드 2, 4번, 스케르쬬 1번, 즉흥곡 3번, 왈츠 3, 7번, 폴로네이즈 2, 4, 5번, 다수의 전주곡, 연습곡, 녹턴 등이 그러하며 그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의 탄식이 표현되지 않은 곡들이 오히려 적을 정도이다.

 

분노의 대표곡은 역시 연습곡 혁명이다. 첫 화음부터 ff의 불협화음이 사용될 정도이니 그 이후는 오죽하겠는가.. 슬픔의 대표곡은? 이미 다 얘기했지만 그것이 바로 발라드 4번이다. 감미로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을 나타내는 도입부에 이어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흐느낌을 연상시키는 첫번째 주제는 결국 여러번의 변주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진짜 흐느낌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흐느낌은 이내 주체할 수 없는 복받치는 슬픔으로 변하여 펑펑 울어댄다. 난 정말 이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들으면 피아노가 생명이 있는 사람처럼 우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내가 직접 칠때는 그 느낌이 온 몸으로 전달되어 더욱 더 전율하게 되기도 한다. ..

 

어떻게 이러한 곡을 작곡할 수 있었을까? 정말 쇼팽은 천재이다. 그런데 발라드 4번을 작곡한 시점은 쇼팽이 죽기 7년전, 즉 1842년이다. 물론 조르주 상드와의 동거생활이 그에게 힘이 되었을테지만 병약해질대로 병약해진 그의 육체로 인하여 매우 지치고 고통스러워하던 시기였을 것 같다. 쇼팽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불과 39세(현재 제 나이와 같네요..)의 아까운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3년전, 즉 1846년 거의 마지막으로 작곡한 걸작이 바로 환상 폴로네이즈이다. 그 곡에는 발라드 4번과 같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우울함과 슬픔이 있지만 한가지 차이점은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같이 가슴벅찬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록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 자신은 승리했다는 초탈적 깨달음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쇼팽과 베토벤을 보면 참으로 감격과 감동을 주는 예술은 바로 절망과 고통으로부터 꽃피워짐을 깨닫게 된다. 아니 그들의 인생 자체가 바로 감격과 감동을 주는 음악이요 예술이 아닐까..

 

2007/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