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의 평균율과 수학
바하의 평균율 곡집을 처음 들은건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방학 때이다. I집과 II집의 유명한 곡만 선별해서 빌헬름 켐프가 연주한 테입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평균율 곡집을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테입이라고 생각되어 동네 레코드 점에서 구입을 했었던 것 같다. 대학교 입학이 확정된 후 어머니 따라서 교회도 다니고 음악도 듣고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삶과 종교에 대해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짧은 기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소나타 그리고 쇼팽의 왈츠 정도가 내가 칠 줄 아는 곡의 전부였었기에 바하의 평균율이 처음에 매우 생소한 음악으로 들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소하고 지루하기 이를데 없었던 바하의 평균율 곡들이 나중에 내 온 영혼을 정화시키는 음악이 될 줄이야! 5번쯤 들을 때부터 한 두곡씩 귀에 들어오더니 한 10번쯤 들으니까 테입에 있는 모든 곡들이 다 나의 마음을 슬픔과 기쁨으로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빌헬름켐프가 연주한 그 두 개의 평균율 테입은 내 친구이자 애인이었다. 힘들고 피곤할때 그리고 외로울때 기숙사 방에서 테입을 틀어놓고 평균율 곡들을 조용히 듣고 있노라면 그 모든 외로움과 격정들이 스르르 사라지며 마치 종교체험을 하듯 평온한 마음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나를 발견하곤 하였다.
평균율 1집과 2집은 각각 24개의 전주곡과 푸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24개의 곡들은 또한 12개의 장조와 12개의 단조로 구성되어 있다. 장조의 곡들은 평온함, 즐거움, 환희, 사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고 단조의 곡들은 비애감, 종교적 경건함, 철학적 진지함을 느끼게 해주어서 말 그대로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작품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또한 '건반음악의 구약성서'라 일컬음 받으며 이 후 베토벤이나 쇼팽과 같은 대가들의 음악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작품이다. (쇼팽의 경우 평균율 곡집에 영감을 받아서 작곡한 곡이 바로 각각 24곡으로 이루어진 전주곡과 연습곡집이다.) 그러나 바하의 평균율 곡집이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조 옮김이 자유로운 현대의 평균율이 바로 바하의 평균율 곡집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평균율 -영어로는 well temperament 또는 equal temperament 라고 한다- 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평균율이란 한 옥타브를 동일한 주파수 비율로 12등분한 것을 말하는데 이로 인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 옮김이 자유롭게 된다. (바하의 평균율 곡집의 경우 이러한 장점을 광고라도 하듯 모든 곡에 있어서 3~4번의 조 옮김은 기본인데 예를 들어 평균율 I-2 fuga의 경우 다단조로 시작했던 곡이 사단조와 다단조 그리고 내림마단조 등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결국 다단조로 마치게 된다.) 하지만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완벽한 화음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화음의 주파수 비가 간단한 정수비로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평균율 이전의 순정율(18세기까지 서양음악을 지배했던 12음계)의 경우에는 솔의 주파수를 도의 주파수의 3/2, 그리고 파의 주파수를 도의 주파수의 4/3로 하여 모든 음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조옮김은 부자연스러웠으나 대신 화음 하나는 기가막히게 완벽했던 것이다. 즉, 교회음악과 같이 완벽하고 순수한 화음을 추구했던 당시 순정율 측면에서 볼때는 비록 자유로운 조옮김이라는 놀라운 기능이 있지만 '완벽하지 못한 화음'을 내는 평균율은 말하자면 '이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하의 경우에도 평균율 1집의 경우에는 그냥 제자들 교육용으로 사적으로 배포했다고 알려져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배포했던 평균율 곡집이 근대 음악혁명을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정말 측량할 수가 없다.) 어쨋든 평균율 곡집이 근대 음악혁명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바하야말로 과학사에 있어서 뉴튼의 지위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또한 얘기할 수 있고, 그러므로, 바하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너무도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평균율과 관련된 수학과 과학을 좀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먼저 가장 간단한 순정율에 대해 알아보자. 파장이 1/2 즉 주파수가 2배가 되면 그것이 바로 한 옥타브 높은 음이 되는데, '도'의 주파수를 1 이라고 가정하면 순정율에서는 '미'가 5/4, '파'가 4/3, '솔'이 3/2, '라'가 5/3의 주파수를 갖게 된다. 즉, '도'의 음파가 3번 진동할 동안에 '파'는 정확히 4번을 그리고 '라'는 정확히 5번을 진동하게 되어 완벽한 '도파라' 화음을 이루게 되고, 또한 '도'의 음파가 4번 진동할 동안에 '미'는 정확히 5번을 그리고 '솔'은 정확히 6번을 진동하게 되어 완벽한 '도미솔' 화음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정율의 역사는 매우 깊은데,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처음으로 순정율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각 음의 주파수를 바로 아래 음의 주파수로 나누어보자. 즉, '라'/'솔' = 1.111, '솔'/'파' = 1.125, '파'/'미' = 1.066 이 된다. 1.066은 반음 주파수 비율이므로 이것의 제곱을 하면 온음 주파수 비율에 해당하는 1.136이 나오는데, 즉 1.111과 1.125, 그리고 1.136에 해당하는 온음 주파수 비율들이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바로 순정율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각 음들의 주파수 비율이 균등하지 않아서 조를 옮기게 되면 악기 전체를 다시 튜닝해야 하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율을 약간씩 조정하면 어떨까? 그러면 화음도 어느정도 맞고 조 옮김도 어느정도 가능한 그러한 음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아이디어에서 평균율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온음 주파수 비율인 1.111과 1.125, 그리고 1.136의 기하평균을 내면 대략 1.124가 나온다. 그러므로, 반음 주파수 비율은 그 square root에 해당되는 1.06이 된다. 그런데 이 1.06은 옥타브의 주파수 비율인 2의 1/12 승을 취해서 나오는 1.0595에 거의 근접한 값이 되므로 한 옥타브를 12개의 음으로 균등하게 나누면 모든 화음을 어느정도 맞추면서 또한 조 옮김이 자유로운 평균율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각 순정율 화음으로부터 추출해낸 반음 주파수 평균 비율인 1.06이 옥타브의 1/12 승을 취해서 나오는 값인 1.0595에 거의 근접한다라는 사실이다. 만약 1.06이라는 값이 옥타브의 1/11 승과 1/12 승의 중간 쯤에 걸쳐 있는 값이었다면 또는 1/12 승과 1/13 승의 중간 쯤에 걸쳐 있는 값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옥타브를 균등하게 11로 나누든 아님 12나 13으로 나누든 순정율같은 완벽한 화음체계는 물건너 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이런 경우에는 어느정도 화음체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옥타브를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 12개의 반음 체계가 아니라 23개 또는 25개의 quarter음 체계를 도입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했을 것이다. 즉, 평균율을 도입하려면 지금의 오선지가 아니라 9선지나 10선지가 필요하게 되어 작곡하는 사람도 피곤하고 연주하는 사람도 많이 피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순정율 화음으로부터 추출한 반음 주파수 평균 비율과 옥타브의 1/12 승 값이 공교(?)롭게도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 중의 우연이요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큰 축복 중의 축복일 것이다. 즉, 이렇게 적절히 12라는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정수의 숫자가 딱 걸려서 많은 인류가 이렇게 음악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 자연과 수리의 법칙이 오묘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끼게 된다. 물론 기존의 12음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균등한 반음체계인 평균율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바하 이전의 수학자 및 과학자들의 창조성과 그리고 그러한 평균율을 자신의 명예와 기득권을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악세계에 몸소 실험했던 바하의 실험정신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혜택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하의 평균율 1집과 2집 전곡 녹음 음반의 명반으로는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를 들 수 있겠다. 그의 평균율 연주는 현대적이면서도 바하의 서정을 충분히 살리는 명연주 중의 명연주라고 생각된다. 음 하나하나 그리고 복잡한 다성 선율 하나하나를 정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살려내는데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때의 그 받았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이다. 사실 당시 평균율에 도전해보겠다는 욕심이 생긴 것도 바로 쉬프의 명반 때문이었는데 어찌됐든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도 제대로 다 치고 있진 못하지만 쉬프는 내 평균율 연주의 가장 큰 스승이다.
2007/6/12 (2009/4/5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