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슬픔과 발라드 4번 II
세계 4대 교향곡의 하나인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의 1악장을 들어보면 제 1 주제가 바로 베토벤의 동명의 피아노 소나타인 8번 비창의 1악장 서두 주제와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쇼팽의 발라드 4번의 경우에도 그 main 주제가 바로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1악장의 서두 주제와 역시 닮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역시 후반부 클라이맥스 부분인데 왼손이 현란한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면서 오른손이 큼직큼직한 옥타브를 짚어나가는 그 폭발적인 선율에서 확실히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에 사용된 선율을 느낄 수 있다.
설마 차이코프스키와 쇼팽이 베토벤을 표절했던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것 보다는 그 선율이야말로 깊은 비애감과 비통함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하고 보편적인 절대성을 지닌 선율이라고 보는 것, 그래서 그 세 명의 대가들이 우연히 그 선율을 독자적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주적이고 절대성을 지닌 진리는 과학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베토벤, 쇼팽, 그리고 차이코프스키가 깊은 비애감을 표현하고자 선택했던 선율이 우연찮게도 비슷한 선율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 yes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쇼팽의 발라드 전곡이 녹음된 명반을 꼽으라면 의외로 아쉬케나지의 64년도 음반을 꼽을 수 있다. (아쉬케나지의 발라드 전곡 녹음 음반은 두 개가 있는데 나머지 하나는 80년대에 발매되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케나지를 좋아하진 않지만 데카에서 발매된 64년도 아쉬케나지의 발라드 전곡 음반은 정말 명반 중의 명반이다. 특히 발라드 4번의 경우엔 앞서 언급한 그 후반부의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격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라모폰에서 2000년대에 발매된 폴리니 음반의 경우에는 속도감은 굉장하지만 그러한 서정성을 살리는데는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과거의 대가 중에서는 역시 루빈쉬타인의 연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발라드 연주는 기교적이면서도 서정성 또한 잃지 않는 교과서적인 명연주이다.
젊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발라드 음반으로 꼽을만한 명반은 키신과 프레디 켐프의 음반이 있다. 키신은 페달을 좀 진하게 밟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발라드 음반은 나름대로 무난하게 들린다. 프레디 켐프의 경우에는 virtuoso적인 엄청난 기교도 기교지만 그 와중에서도 발라드 4번의 서정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엿보여서 나름대로 좋아하는 연주이다. 최근에 임동혁 군의 발라드 4번 연주를 인터넷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기교적인 면에서는 훌륭하지만 역시 감성적인 측면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보포고렐리치가 발라드 4번 연주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발라드 4번을 연주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약간의 아쉬운 상상을 해본다.
2007/06/22